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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 이광수가 도산 안창호의 전기문을 쓴 이유는?

by 냉정한망치 2025.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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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이광수
Lee Kwang-su, Korean writer @wikimedia commons


 

이광수(1892~1950)는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으면서도, 동시에 친일 행적 때문에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인물입니다. ‘춘원’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근대 문학의 기틀을 세운 대표적인 작가이지만, 해방 후 친일파로 낙인찍히며 역사적 평가가 크게 엇갈립니다. 그가 3.1 운동 당시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활동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친일 행적은 더욱 충격적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이러니한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그가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전기문을 썼다는 점입니다. 매국노라 불린 이광수가 독립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의 전기문을 남겼다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요?

도산 안창호
Dosan Ahn Chang-ho in 1919 @wikimedia commons

도산 안창호와 이광수의 관계

이광수는 젊은 시절 도산 안창호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그가 10대 후반일 때, 도산이 설립한 신민회와 흥사단에서 교육을 받으며 민족의식과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을 키웠습니다. 1910년대에 그는 안창호의 사상에 감화되어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3.1 운동 이후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과 타협하게 되었고, 결국 친일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도산 안창호의 전기문을 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Ahn Changho (Ahn Chang-ho, 안창호, 安昌浩)'s family, 1917 @wikimedia commons

이광수가 친일을 선택한 이유

이광수가 친일로 돌아선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첫째, 일본의 압도적인 식민통치 아래에서 독립운동의 한계를 절감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초기에는 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점점 현실적으로 일본과 협력하는 것이 생존과 출세의 길이라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둘째, 그의 사상적 변화를 들 수 있습니다. 이광수는 점차 '민족의 발전'을 내세우며, 일본과 협력하는 것이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셋째, 개인적인 생존과 사회적 지위도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친일을 통해 그는 권력층과 가까워졌고,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타협과 변절의 길을 선택한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됩니다.

춘원 이광수 젊은 시절
Yi Gwang-su, a Korean writer, poet, novelists, in 1918 Toykyo @wikimedia commons

이광수의 친일 행적

이광수의 친일 행적은 단순한 사상적 전향을 넘어 적극적인 친일 활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의 침략 전쟁을 지지하는 글을 다수 발표하였으며, 1940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하여 전쟁 수행을 독려하는 활동을 펼쳤습니다. 1941년에는 <국민문학>을 통해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을 지지하는 글을 썼고, 조선어 말살 정책에도 동조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또한, <반도신문>과 <매일신보> 등에 친일 논설을 기고하며 ‘대동아공영권’ 이념을 찬양하는 등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을 선전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이러한 행보로 인해 그는 해방 후 대표적인 친일 문인으로 지목되었으며, 변절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광수 가족 사진
Family of Yi Kwang-su @wikimedia commons

이광수가 도산 전기문을 쓴 이유

이광수가 도산 안창호 전기문을 집필한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 도산에 대한 존경심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비록 친일로 돌아섰지만, 젊은 시절 그가 받았던 영향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둘째, 자신의 과거 독립운동 경력을 미화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친일 행적이 있었던 만큼, 도산과의 인연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이미지에 변화를 주려 했을 수 있습니다. 셋째, 현실적인 이유에서 일본의 검열과 사회 분위기에 맞춰 친일을 선택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여전히 민족에 대한 애정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역사는 이광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광수는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만, 그의 친일 행적은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가 도산 안창호의 전기문을 쓴 것은 그 자체로 역사의 아이러니이며, 그의 복잡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한 사례입니다. 우리는 역사적 인물을 평가할 때, 단순한 흑백논리가 아닌 입체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도산 안창호와 친일을 선택한 이광수의 길은 결국 극명하게 갈라졌다는 점입니다. 그가 남긴 문학적 유산과 친일 행적을 함께 바라보며, 역사의 교훈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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