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이었다. 늦은 저녁, 배달 음식 하나 시켜놓고 친구랑 수다를 떨던 중이었다.
내가 무심코 한 마디를 던졌다.
“아 진짜, 요즘 배를 곯고 다니노…”
(↑ 부산 사투리로..)
그 순간, 친구가 피식 웃더니 이렇게 되물었다.
“곯고? 곯고가 뭔데? 리을 기역 받침이야? 굶었다는 거야?”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게슈탈트 붕괴가 이런건가.
분명 어릴 적부터 들어온 말인데, 갑자기 맞춤법이 어색하게 느껴지고 받침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배를 곯다’는 표현이 낯설어지면서, ‘곯다’, ‘고다’, ‘곪다’, ‘굶다’ 같은 비슷한 단어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그중 일부는 국어책에서나 본 것 같고, 일부는 어릴 적 어른들 입에서만 들었던 느낌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헷갈리고 있었네!
헷갈리는 한국어 표현, 제대로 알고 있나요?
말소리는 비슷하지만 뜻은 완전히 다른 단어들.
잘못 쓰기 쉬운 표현들, 당신은 정확히 알고 있나요?
'곯다'
참고로, 이 표현은 원래 ‘배곯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했습니다.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지만, 국어사전에는 여전히 표제어로 남아 있죠.
우리가 흔히 쓰는 ‘배를 곯다’는 그 말을 더 자연스럽게 풀어 쓴 형태라고 볼 수 있어요.
단어 하나씩 정확히 짚어봅시다
- 곯다
배를 곯다 / 밤이 곯았다
→ 안에 든 것이 썩다, 혹은 굶주림을 당하다는 의미. - 고다
사골을 고다 / 육수를 고아내다
→ 오랜 시간 푹 끓여 국물이나 진액을 내는 행위. - 곪다
상처가 곪았다
→ 상처나 부스럼 등이 썩고 고름이 생긴 상태. - 굶다
밥을 굶었다
→ 식사를 거르거나 못한 상황. 현대어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됨. - 괴다
턱을 괴다 / 머리를 괴다
→ 손으로 받쳐 들다. 표준어. - 고우다
→ 표준어 아님. ‘괴다’의 방언 또는 사투리.
참, 이쯤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어요.
가끔 누군가는 “곰국을 고우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알고 보면 이건 ‘고다’의 사투리 버전이 아니라,
‘괴다(턱을 괴다)’의 방언에서 온 말이에요.
그러니까 곰국을 오래 끓이는 행위는,
언제나 ‘고다’가 정확한 표현인 거죠.
혼동하기 쉬운 단어 비교표
단어 | 의미 | 사용 예시 |
곯다 | 굶거나, 속이 썩다 | 배를 곯다 / 밤이 곯다 |
고다 | 오래 끓여 진액을 내다 | 사골을 고다 |
곪다 | 상처가 썩어 고름이 생김 | 상처가 곪았다 |
굶다 | 식사를 거르다 | 밥을 굶었다 |
괴다 | 손으로 받치다 | 턱을 괴다 |
고우다 | (비표준, 사투리) | (사투리 표현, 사용 주의) |
곯다, 문장 속에서는 이렇게 바뀝니다
구분 | 활용 형태 | 예문 |
현재형 | 곯는다 / 곯고 있다 | 요즘 배를 곯고 있어. 밤이 좀 곯은 것 같아. |
과거형 | 곯았다 / 곯았네 | 예전엔 진짜 배 곯았지. 이거 곯았네, 못 먹겠다. |
미래형 | 곯겠다 / 곯게 될 거야 | 또 안 먹으면 곯겠다. 계속 이러면 배 곯게 될걸? |
조건형 | 곯으면 / 곯기 시작하면 | 더 두면 곯으면 못 먹어. 하루 안 먹으면 바로 곯기 시작하더라. |
이유·원인 | 곯아서 / 곯기 때문에 | 감자가 곯아서 상했어. 밤은 곯기 때문에 오래 못 둬. |
명사형 | 곯는 중 / 곯는 기색 | 지금 곯는 중이라 말 걸지 마. 곯는 기색이 역력하더라. |
감탄·불평 | 곯았네 / 곯겠네 | 와 이거 곯았네! 밥 또 안 챙기면 곯겠네, 진짜. |
마치며: 다시 아는 순간의 기억
그날 밤, 인터넷 검색을 통해 “배를 곯다”는 표현이 진짜 존재한다는 걸 확인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오… 곯다 맞네? 히읗 받침이었어?”
“그니까. 괜히 나만 이상한 줄 알았잖아.”
그렇게 소소한 말 하나로 시작된 대화는,
우리가 언어를 얼마나 무심히 흘려보내며 살아왔는지를 자각하게 만들었다.
“배를 곯다”는 말은 요즘 자주 쓰이는 표현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표현일수록, 잊히지 않게 되새기고 이야기 나누는 순간들이 더욱 소중하다.
단어 하나에 담긴 시대의 감각,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그 단어를 “다시 아는 순간”의 기억.
언어는 그렇게 살아 있는 것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