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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어릴 적 기억을 잃어버릴까, 뇌가 일부러 포맷하기 때문이다

by 냉정한망치 2025.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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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 기억상실 관련 참조 일러스트


세 살 무렵의 기억이 있나요?
아마 거의 없으실 겁니다.
저 역시도 그 시절의 나는 앨범 속 사진으로만 존재합니다. 분명 그때도 울고, 웃고, 세상을 배웠을 텐데 왜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까요? 단순히 어렸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사실 우리 뇌는 기억을 잊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실수나 오류가 아니라 성장을 위한 필수 기능입니다.


뇌는 어릴 때 스스로 기억을 지운다

과학자들은 이 현상을 유아 기억상실이라고 부릅니다.
평균적으로 사람들은 3~4세 이전의 일은 거의 기억하지 못하죠. 하지만 그건 기억이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니라, 뇌가 성장하면서 일부러 지워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뇌 속에는 기억의 관문이라 불리는 기관이 있습니다. 바로 해마입니다.
해마는 기억을 저장하고 꺼내는 일을 담당하죠. 그런데 해마는 태어날 때 완성되어 있는 게 아니라, 4세 무렵부터 급격히 자라기 시작합니다.

왜 4세 무렵에 해마가 급격히 자라면서 이전의 기억을 지우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과학자들은 이 시기가 뇌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전환점이라, 새로 만들어진 회로가 이전의 미완성된 기억 체계를 덮어쓰는 과정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시기에 새로운 뉴런, 즉 뇌세포가 폭발적으로 생기면서 기존의 회로를 덮어쓰거나 끊어버린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아기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머릿속 하드디스크를 업그레이드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데이터들이 포맷되는 셈이죠.

그래서 그 시절의 기억이 희미해지거나 완전히 사라집니다.
이건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배울 준비 과정입니다.
뇌가 비워야 더 많이 담을 수 있는 것처럼요.

어릴 때 사진을 보는 성인 남자 일러스트

실험으로 확인된 기억 삭제의 증거

프랭클랜드 박사라는 신경과학자는 쥐를 이용한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어린 쥐와 어른 쥐를 각각 금속 우리에 넣고 가볍게 전기 자극을 줬죠.
이후 다시 같은 우리에 넣어 반응을 관찰했습니다.

어른 쥐는 그 공포를 기억해 몸을 굳혔지만,
아기 쥐는 하루 만에 그 일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그런데 연구진이 아기 쥐의 뉴런 생성을 억제하자,
놀랍게도 그 쥐는 어른 쥐처럼 겁을 먹었습니다.
즉, 기억을 유지한 거죠.

반대로 어른 쥐에게 운동을 시켜 뉴런 생성을 늘리자,
오히려 기억이 더 빨리 사라졌습니다.

정리하자면, 새로운 뇌세포가 많이 생길수록 예전 기억은 흐려진다는 뜻입니다.
새로 들어온 뉴런들이 기존의 기억 회로를 덮어쓰기 때문이죠.

이건 마치 새로 이사 온 집에 짐을 들이기 전에
낡은 물건과 오래된 박스를 정리하는 일과 비슷합니다.
버리는 게 아까워도, 그 자리를 비워야 새로운 삶의 물건들이 들어올 수 있죠.
뇌도 마찬가지입니다.
잊는다는 건 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담기 위한 준비 과정인 셈입니다.

프랭클랜드 박사의 쥐 실험 참조 일러스트

사라진 기억은 정말 없을까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잊은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는 것 말이죠.

최근 연구에 따르면, 유아기의 기억은 단지 꺼내기 어려운 상태일 뿐
뇌 어딘가에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fMRI라는 장비를 사용했습니다.
fMRI는 기능적 자기공명영상의 약자로,
사람의 뇌를 촬영하면서 어느 부위가 활성화되는지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기술입니다.
이를 통해 1살 정도의 아기에게서도 해마가 이미 기억을 저장하는 활동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또한 쥐의 뇌에 빛 자극을 줘 유아기 기억 신호를 다시 활성화하자
어릴 때의 기억 반응이 되살아나기도 했습니다.

즉, 우리 뇌 속에는 잊은 기억들이 서랍 속 파일처럼 숨어 있고,
단지 그걸 꺼내는 열쇠를 잃어버린 것뿐입니다.

그 파일은 언젠가 비슷한 냄새나 소리, 감정 같은 단서로 문득 열리기도 하죠.
그래서 어떤 냄새 하나에 갑자기 어린 시절의 장면이 스치듯 떠오르기도 하는 겁니다.

뇌의 기억 저장소(캐비닛) 참조 일러스트


마치며: 잊는다는 건 다시 자라는 일

결국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잊는 법을 배우며 성장합니다.
아이의 뇌는 새로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 기억을 덜어내고,
그 덕분에 우리는 빠르게 배우고 적응하며 어른이 됩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괴로워합니다.
슬픈 기억, 부끄러운 기억, 고통스러운 기억까지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과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억은 신의 선물이고 망각은 신의 축복이라고.

우리가 어릴 적의 모든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불행이 아닙니다.
그건 뇌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키워내기 위해 준비한
가장 섬세한 성장의 과정입니다.

아마도 뇌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겁니다.
모든 기억을 안고는 아무도 행복하게 자라날 수 없다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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