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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외요! 호외? 그 시절 버스 정류장에서 울리던 외침, 지금은 손 안에서 울린다

by 냉정한망치 2025.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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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외 포스팅 섬네일


어린 시절, 도시의 거리를 걷다 보면 가끔 들려오던 그 외침이 기억나시나요? "호외요, 호외!" 작은 체구의 소년들이 신문을 높이 들고 목청껏 외치던 그 모습. 지금은 스마트폰 알림으로 대체된 그 시절의 '생생한 속보 전달자'였습니다.

'호외(號外)'는 한자로 풀이하면 '호(號)'는 '번호', '이름', '부르다'라는 의미이고, '외(外)'는 '바깥', '정해진 것 이외'를 뜻합니다. 즉, '정해진 번호 이외의 것'이라는 의미로, 정기 간행물의 정해진 발행 일정 외에 별도로 긴급하게 발행된 특별판 신문을 뜻하는 것이죠. 대통령 서거, 전쟁 발발, 중대한 사회적 사건과 같이 기다릴 수 없는 뉴스가 있을 때, 신문사들은 정규 발행 일정과 관계없이 급히 1~2면짜리 호외를 발행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호외는 충격적인 소식을 가장 빨리 접할 수 있는 창구였고, 그래서 무료로 배포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인터넷도, TV도 없던 시절, 호외는 사회를 뒤흔드는 뉴스의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1960-1980년대 호외를 외치던 신문 팔던 소년 일러스트

신문팔이 소년들, 시대의 그림자에 숨겨진 얼굴들

"호외요!" 그 외침을 전하던 이들은 누구였을까요? 주로 10대 초반, 어쩌면 더 어린 나이의 소년들이었습니다. 학교 교실 대신 번잡한 거리를, 교과서 대신 묵직한 신문 뭉치를 들고 있던 아이들. 그들 대부분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포기하고 가족의 생계를 돕던 소년들이었습니다.

이 소년들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도시의 거리를 누볐습니다. 새벽부터 신문사에 가서 신문을 떼어와 거리로 나갔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도 그들은 신문을 들고 달렸죠. 또래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부할 때, 이 소년들은 목이 쉴 때까지 외치며 도시의 골목골목을 누볐습니다. 하루 종일 무거운 신문 뭉치를 들고 다니는 것은 어린 소년들에게 무척 고된 일이었지만, 가족의 저녁 식탁에 한 그릇이라도 더 올릴 수 있다는 책임감으로 매일을 버텼습니다. 그들의 작은 어깨에는 가족의 생계라는 무거운 짐이 얹혀 있었던 것입니다.

동아일보 김기수 호외 신문
東亜日報 김기수 호외 신문 @wikimedia commons

호외의 세계적 동류와 역사적 유래

'호외'라는 개념은 비단 한국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어권에서는 "Extra edition" 또는 "Special edition"이라고 불렸죠. 할리우드 영화나 미국 드라마에서 종종 등장하는 "Extra! Extra! Read all about it!"이라는 외침은 미국의 신문팔이 소년들이 호외를 팔 때 외치던 문구였습니다.

'호외(號外)'라는 용어의 역사적 유래를 살펴보면, 이는 일본 메이지 시대(1868-1912)의 신문 문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서구의 언론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정규 발행물이 아닌 임시 속보판을 '호외(號外)'라고 불렀습니다. 이 용어가 한국으로 전해져 우리나라 근대 언론에도 정착하게 된 것이죠. 특히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한국 언론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호외'는 중요한 뉴스 전달 매체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처럼 '호외'는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에서 발전한 미디어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영미권의 "Extra!"와 동아시아의 "호외"는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동일한 필요에 의해 탄생한 쌍둥이와도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미국의 뉴스페이퍼 보이 이미지
Newspaper boy

신문팔이 소년들의 등장과 퇴장

한국에서 신문팔이 소년들은 주로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포기하고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많은 소년들이 신문 판매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들은 도시의 주요 거리와 역, 버스 정류장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신문을 판매했습니다.

그들의 하루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 잠든 새벽에 시작되었습니다. 인쇄 잉크 냄새가 채 마르지 않은 신문을 받아 묶고, 무거운 신문 더미를 어깨에 메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한 손으로는 신문을 들고, 한 손으로는 동전을 거슬러 주며, 쉴 틈 없이 걷고 뛰고 외쳐야 했죠. 허기진 배를 움켜쥐며 마지막 한 부를 팔기 위해 애쓰던 그 모습은, 당시 한국 사회의 어려운 현실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초상이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는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국가 경제가 성장하고 교육열이 상승하면서, 어린 나이에 거리로 나와 신문을 파는 소년들의 수가 점차 감소했습니다. 또한 사회적으로 아동 노동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아동 보호 정책이 강화되면서, 1990년대 들어서는 신문 판매와 배달을 주로 주부나 노인 등 다른 연령층이 맡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시대를 상징했던 '신문팔이 소년'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신문팔이 소년들이 현대에 와서는 스마트폰으로 대체, 일러스트

디지털 시대, 사라진 '호외'와 '신문팔이 소년들'

"띵동-" 스마트폰에서 울리는 뉴스 알림. 이제 우리는 중대한 뉴스가 발생해도 더 이상 거리의 신문팔이 소년들의 외침을 듣지 않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세상의 모든 소식을 접하는 시대가 되었으니까요. 디지털 혁명은 호외라는 매체를 역사의 뒤안길로 보냈고, 그와 함께 '신문팔이 소년'이라는 직업도 사라졌습니다.

한때 도시의 거리를 누비며 가장 빠른 정보 전달자 역할을 했던 그 소년들은 이제 어디에 있을까요? 혹시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중년 이상의 독자분들 중에는 어린 시절 잠시라도 신문을 팔았던 기억이 있으신가요? 그들은 이제 우리 사회의 다양한 곳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전했던 "호외요!"라는 외침은 우리의 집단 기억 속에 아련한 향수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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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며: 시대의 목격자, 호외와 신문팔이 소년들

"호외요!" 그 외침 속에는 단순한 뉴스 전달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것은 산업화 시대 대한민국의 사회상, 교육 기회의 불평등, 도시 빈곤층의 삶을 보여주는 창이기도 했습니다. 소년들의 맑은 목소리를 통해 전해진 뉴스들은 우리 현대사의 고비고비를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스마트폰의 알림음으로 세상의 변화를 접합니다. 하지만 '호외'의 시대를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단지 옛 미디어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정보와 뉴스가 어떻게 우리 사회를 형성해왔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외된 이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돌아보는 계기이기 때문입니다.

한 시대의 '살아있는 푸시 알림'이었던 신문팔이 소년들과 호외. 그들의 외침은 사라졌지만, 속보를 전하는 그들의 역할과 정신은 다른 형태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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