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

당신의 죽음은 계획되어 있나요? 플랜 75와 디지털 유산, 웰다잉에 대한 고찰

by 냉정한망치 2025. 8. 5.
반응형
영화 플랜 75 참조 일러스트

"75세가 되어서
몸은 아픈데 일자리는 없고,
자식도 없고, 돈도 없다면...
그때 정부가
'편안한 죽음'을 제안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영화 《플랜 75》를 보고 나서 그날 밤 잠들기 전까지 이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고령화가 극심해진 일본, 노인 부양비는 치솟고 의료비는 국가 재정을 압박한다. 그때 정부가 내놓은 해결책이 바로 '플랜 75'다. 75세 이상 노인들에게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국가가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 제도는 놀랍도록 친절하다. 가입하면 10만 엔의 지원금이 지급된다. 이 돈은 가족에게 유산으로 남기거나, 생전에 하고 싶었던 마지막 일을 위해 쓸 수 있다. 게다가 깔끔한 숙소에서 마지막 며칠을 무료로 보낼 수 있고, 좋아하는 음식도 무료로 제공되며, 장례까지 모든 비용을 국가가 부담한다. 심지어 전담 상담사가 배정되어 마지막 순간까지 세심하게 돌봐준다. 마치 '죽음을 서비스화한 국가 복지'처럼 포장되어 있다.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 '미치'가 플랜 75에 가입하는 이유를 보면 섬뜩해진다. 청소 일자리에서 해고당하고, 집에서도 쫓겨나고, 의지할 가족도 없다. 자유로운 선택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살 수 없게 만든 사회가 죽음을 권유하는 것이다. 국가는 노인 복지 예산을 늘리는 대신, 노인들이 스스로 사라지는 길을 열어준 셈이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건 그저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사회의 거울이다

웰다잉(Well-Dying). 좋은 죽음, 품위 있는 죽음을 뜻하는 이 말이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우리 곁에 자리 잡았다. '잘 먹고 잘 살자'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잘 죽자'는 시대가 된 것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생전 장례식 체험, 유언 영상 제작, 죽음학교 수강... 이런 것들이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물론 옛날에도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있었다. 유언장을 쓰고, 묘자리를 미리 정하고, 자손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남기는 것. 하지만 지금의 웰다잉은 차원이 다르다. 죽음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만들어버렸다. 체크리스트가 있고, 가이드라인이 있고, 전문가가 있고, 심지어 죽음에도 '성공'과 '실패'가 있다고 말한다.
좋은 삶을 살았다면, 좋은 죽음을 맞아야 한다는 또 하나의 강박이 여기 있다. 마치 죽음마저도 우리가 완벽하게 통제하고 연출해야 할 마지막 무대인 것처럼. 그런데 정말 그럴까? 죽음을 이렇게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이 진정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일까, 아니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해야 할 것'들로 우리를 옭아매는 것일까.

마지막 옵션을 놓고 고민하는 노인 일러스트

디지털 시대의 죽음, 잊혀지지 않는 나

구글에는 '휴면계정 관리자'라는 기능이 있다. 일정 기간 동안 로그인하지 않으면 미리 지정한 사람에게 계정 접근 권한을 넘기거나 아예 계정을 삭제하는 서비스다. 페이스북(현 메타)도 마찬가지다. 사용자가 생전에 지정한 인물이 페이스북에 요청하면 고인의 계정이 기념 계정으로 전환된다. 이렇게 전환된 계정은 '추모 계정'이 되어 친구들이 추모 메시지를 남길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뀐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에도 빈틈은 있다. 미리 설정하지 않았거나, 가족이 사망 사실을 모르는 경우라면? 그 사람의 디지털 흔적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대로 남아있다. 생일이 되면 친구들에게 생일 축하 알림이 뜨고, 과거 게시물들이 '추억'으로 다시 떠오른다. 심지어 자동 생성된 '1년 전 오늘' 같은 알고리즘들이 죽은 사람의 일상을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디지털 공간에서는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상태가 계속된다. 몸은 사라져도, 남은 데이터는 살아 있다.

죽은 이를 디지털 공간에서 추모하는 일러스트

죽음마저 알고리즘이 관리하는 시대

죽음을 둘러싼 모든 것이 기술의 영역이 되어가고 있다. 인공지능이 유언을 작성해주고, AI 챗봇이 죽은 가족의 목소리를 재현하고, 온라인 장례식장에서 가상 헌화가 이뤄진다. 심지어 생전의 SNS 활동을 학습한 챗봇이 죽은 사람을 '부활'시켜 대화까지 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기술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한 사랑일까, 아니면 놓아주지 못하는 집착일까. 기억은 꼭 영원해야 할까. 망각은 때때로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치유가 되기도 하는데, 우리는 기술을 통해 기억을 동결시키고 반복한다. 죽음의 자연스러운 과정마저도 통제하고 싶어 한다.
전 세계에서 '존엄한 죽음'을 찾아 스위스로 향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르코(Sarco)' 캡슐에 누워서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고통 없이 5분 안에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안락사 캡슐인데,  《플랜 75》 속 국가 주도의 죽음과는 다르지만, 결국 '죽음을 선택할 권리'라는 같은 질문에 닿아 있다.
죽음을 준비하는 방식이든, 기술의 도움을 받는 방식이든, 각자의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생명의 존엄과 소중함이라는 가치 위에 서 있다. 존엄사와 안락사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생명의 절대적 가치 사이에서 우리는 여전히 답을 찾고 있는 중이다.

노인이 빛을 향해서 가고 있는 일러스트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