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알쓸신잡

전쟁 후 배고픔 속에서 탄생한 삼양라면: 한국을 구한 한 그릇의 이야기

반응형

안녕하세요! 냉망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흔히 즐겨 먹는 '삼양라면'의 탄생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워낙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그때의 상황과 한 기업가의 충격적인 경험, 그의 애국심과 인류애, 그리고 운명적인 만남이 만들어낸 감동 실화를 다시 한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1963년 9월 15일, 한국 최초의 라면이 탄생한 그 날로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삼양라면
삼양라면 .삼양식품 홈페이지

충격의 순간: 꿀꿀이죽과의 만남

1961년,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대한민국. 당시 굴지의 보험회사 사장이었던 전중윤 회장은 남대문시장을 지나다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합니다.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한 그릇에 5원 하는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서였죠. 그 광경이 너무나 안타까워 저도 모르게 그 줄에 섰습니다."

 

호기심에 한 숟가락 떠먹은 전중윤 회장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죽 속에서 깨진 단추 조각과 담배꽁초까지 나온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꿀꿀이죽'이란 것이 미군 기지에서 버린 음식을 가져다 다시 끓인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먹기 위해 줄까지 서고 있었던 거죠."

 

이 충격적인 경험은 전중윤 회장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꿀꿀이죽을 먹는 들람들

 

라면, 식량난 해결의 열쇠

먹을 것이 없어 미군이 버린 음식을 끓여 한 끼를 때우는 비참한 모습을 본 전중윤 회장은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식량난이 해결되지 않으면 인간의 존엄성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요. 무언가 해야만 했습니다."

 

고민 끝에 그는 50년대 말 일본에서 경영연수를 받을 때 먹어본 '라멘'을 떠올렸습니다.

"라면이야말로 우리나라의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라고 확신했습니다. 빠르고 저렴하게 만들 수 있으면서도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 바로 라면이었죠."

 

삼양식품 故전중윤 회장(1919~2014)

일본으로의 모험: 5만 달러의 종잣돈

전중윤 회장은 라면 제조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행을 결심합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의 경제 사정은 매우 어려웠고, 외화는 극히 귀한 시절이었습니다.

"기술을 배우고 설비를 들여오려면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했죠."

 

 

전중윤 회장의 열정과 비전에 감명받은 김종필 부장의 도움으로, 한국은행을 통해 미화 5만 달러를 불하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라면 생산설비 구매를 위한 소중한 종잣돈이 되었습니다.

 

묘조식품 CI
묘조식품 CI

묘조식품 오쿠이 사장과의 만남

일본에 도착한 전중윤 회장은 수소문 끝에 라면 생산 기술을 이전받을 기업으로 일본의 묘조(明星)식품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됩니다. 바로 오쿠이 사장과의 만남이었죠.

"오쿠이 사장님, 저는 한국인들을 위해 라면을 만들고 싶습니다.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전중윤 회장의 진심 어린 호소에 오쿠이 사장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오쿠이 사장은 라면 제조기술 전수는 물론, 삼양식품이 정상궤도에 오를 때까지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일본 묘조식품 설립자 오쿠이 사장
묘조식품 설립자 故오쿠이 키요즈미(1922~1973)

25일간의 도전: 라면 제조 기술 습득

전중윤 회장은 묘조식품 공장에서 25일 동안 매일같이 출근하며 라면 제조 공정을 익혔습니다.

"매일 아침 일찍 공장에 출근해 밤늦게까지 모든 공정을 꼼꼼히 배웠습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지만, 우리 국민을 위해 꼭 성공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버텼죠."

 

그의 열정과 노력에 감동한 묘조식품 직원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노하우를 전수해주었습니다.

 

과거 라면 설비공장에서 라면 제조

 

마지막 순간의 선물: 비밀의 레시피

하지만 라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스프의 비밀 배합률은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도 라면 제조기술은 최신 기술로 극비에 부쳐졌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배웠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스프의 비밀은 알 수 없었습니다. 마치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없는 것 같았죠."

 

그러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귀국을 앞두고 공항으로 향하던 그 날, 오쿠이 사장이 전중윤 회장에게 작은 봉투 하나를 건넸습니다.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오쿠이 사장님이 저를 불러세우더니 봉투 하나를 주셨어요. 열어보니 그토록 갈망하던 스프의 비밀 배합비율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죠."

 

귀국 후: 삼양라면의 탄생과 성공

모든 퍼즐 조각을 손에 쥔 전중윤 회장은 한국으로 돌아와 즉시 라면 생산에 착수했습니다. 1963년 9월 15일, 마침내 '삼양라면'이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라면을 어떻게 먹는지 몰라 당황했죠. 하지만 곧 그 맛과 편리함에 매료되었고, 삼양라면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훗날 삼양식품에서 만든 라면이 일본으로 역수출되어 일본 라면 업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제자가 스승을 뛰어넘는 순간이었죠.

 

최초의 한국 라면
최초의 한국 라면 '치킨라면' .삼양식품

마치며...

삼양라면의 이야기는 단순한 비즈니스 성공담이 아닙니다. 이는 국민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해결책을 찾아 나선 한 기업가의 용기와 결단, 그리고 인류애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국경을 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도왔던 두 기업인의 감동적인 우정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전중윤 회장은 오쿠이 사장에 대한 고마움을 평생 잊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오쿠이 사장이 작고한 후에도 그의 자녀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극진히 대접했다고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즐겨 먹는 라면 한 봉지 속에는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다음에 삼양라면을 드실 때는, 이 이야기를 떠올려보시는 건 어떨까요? 한 그릇의 라면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더욱 특별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의 생각을 댓글로 남겨주세요!

728x90
반응형